
분자 수준에서 발생하는 에너지 변환과 화학 반응을 실시간으로 제어하는 기술이 한일 공동 연구를 통해 개발됐다. 다양한 광학 현상을 높은 시간 분해능으로 측정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 것으로 기대된다.
광주과학기술원(GIST, 총장 임기철)은 화학과 김유수(기초과학연구원(IBS) 양자변환연구단장)·이마다 히로시 교수가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 요코하마국립대, 도쿄대, 하마마츠포토닉스㈜(Hamamatsu Photonics K.K.), 울산대와 함께 분자 수준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실시간 초고속으로 관측·제어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7일 밝혔다. 연구성과는 세계적 과학저널 '사이언스(Science)'에 이날 게재됐다.
이번 연구는 머리카락보다 얇은 나노미터(nm, 1nm는 10억분의 1미터) 크기의 물질을 시각화해 관찰할 수 있는 주사터널현미경(STM)과 피코초(ps, 1ps는 1조분의 1초) 단위의 매우 짧은 시간 스케일을 가진 테라헤르츠(THz) 광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분자와 전극 사이에서 전하가 이동하는 현상(전하 교환)은 유기 소자나 촉매 표면에서 발생하는 화학 반응 등에서 나타나는 기본적인 분자 과학 현상 중 하나다.
이러한 전하 이동 과정에서는 전하 상태나 여기자와 같은 과도적인 중간 상태가 형성된다. 그러나 이 상태들은 수명이 피코초(ps, 1ps는 1조분의 1초) 수준으로 매우 짧아, 특성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초고속으로 전하를 제어하는 것이 필요하다.
최근 광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피코초 단위의 짧은 시간 폭을 가진 테라헤르츠(THz) 영역의 광 펄스를 사용해 초고속 전하 제어가 가능해졌다. 특히, 테라헤르츠(THz) 펄스를 주사 터널 현미경(STM)과 결합함으로써 나노미터(nm) 수준에서 물질에 전하를 주입할 수 있게 됐다.
기존의 THz-STM은 전하 조작에 따른 전류만 측정할 수 있어, 분자에 전하를 주입했을 때 일어나는 분자 상태의 변화를 조사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에 연구팀은 STM에 광학 기술을 결합한 장치(광학 STM)를 개발하여, 단일 분자 수준에서 다양한 양자 현상을 보다 정밀하게 관측하는 데 성공했다.
연구팀은 광학 STM과 THz 펄스를 결합한 THz-광학 STM 장치를 이용해, 중심에 팔라듐(Pd) 원자가 포함된 Pd 프탈로시아닌 단일 분자를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연구팀은 THz 펄스를 STM에 조사하여, 660 nm 근처의 파장 대역에서 분자의 발광을 검출할 수 있었다. 이 결과는 Pd 프탈로시아닌 분자의 프론티어 궤도(HOMO와 LUMO)에 전하가 주입되면서 여기자가 형성되고, 이로 인해 발광이 발생했음을 의미한다.
흥미롭게도, 발광을 측정하는 동안 전류도 함께 측정한 결과 전류가 거의 흐르지 않았다. 이는 STM 탐침과 분자 사이에서만 전하가 교환되었으며, 분자를 통과하는 순전류가 거의 없었음을 가리킨다.
다음으로, 연구팀은 THz 펄스의 파형을 변화시켰을 때 발광 현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조사했다. 여기서 THz 펄스의 파형은 캐리어 엔벨로프 위상이라는 물리량으로 표현할 수 있다.
연구팀은 캐리어 엔벨로프 위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광학 소자인 ‘THz 위상 쉬프터’를 개발하여 THz 펄스의 파형을 제어했다. 캐리어 엔벨로프 위상을 변화시키면서 분자에서 방출되는 발광 강도를 측정한 결과, THz 펄스의 파형이 달라짐에 따라 발광 강도가 변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특히, 위상이 210° 근처일 때 발광 강도가 최대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을 분석한 결과, THz 펄스 파형에서 2.5ps 근처의 서브 피크(적색 부분)에서 분자의 최저 공백 궤도(LUMO)에 전자가 주입되면서 분자가 일시적으로 음전하 상태가 되고, 3.5ps 근처의 메인 피크(청색 부분)에서 분자의 최고 피차 궤도(HOMO)에서 전자가 빠져나가면서 정공이 생성되어 여기자가 형성된 것으로 해석했다.
연구팀은 이러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THz 펄스를 이용한 초고속이면서도 연속적인 전하 주입을 통해 분자의 상태를 제어하고 여기자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김유수 교수는 “이번 연구를 통해 THz 펄스와 광학 STM을 결합하여, 극한의 시공간 분해능으로 분자의 양자 상태를 측정하고 제어하는 방법을 확립했다”면서, “이번에는 분자에서 방출된 빛을 검출하는 데 그쳤지만, 다른 레이저 광원과 결합하면 라만 산란 현상이나 광발광 등 다양한 광학 현상을 높은 시간 분해능으로 측정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