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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부처·공공기관

임진우 건축가의 스케치여행 ㉙ 선암사와 낙안읍성 민속마을

[웹이코노미=글·그림 임진우] 전남 순천에는 가볼만한 곳이 많다. 전국에서 가장 선호하는 절을 나에게 하나 꼽으라면 주저없이 순천 선암사를 든다. 지리멸렬한 삶에 지쳐서 어디라도 슝 바람이라도 쐬러 다녀와야겠다는 지인이 있다면 선암사를 가보라고 강력히 추천하고 싶다. 전남 순천시 승주읍에 위치한 선암사는 조계산을 중심으로 유명한 송광사의 반대 측에 위치하고 있다.

 

 

선암사는 송광사에 비해 규모도 크지 않을 뿐 아니라 인지도 역시, 대중들에게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사찰이다. 두 건물을 상업건축으로 비유해서 말하자면 송광사는 스타필드이고 선암사는 홍대거리 쯤 되겠다. 송광사가 대규모로 집약된 거대사찰이라면 선암사는 길과 경사에 따라 자유롭게 배치된 평범한 시골마을 공동체의 모습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속세를 벗어나보세요"라고 재잘대며 지저귀는 새소리가 입체음향으로 연속되며 길게 이어진 숲 속 진입로는 다른 주파수의 영역으로 전이되는 과정이다. 호흡이 거칠어지는 시점, 본격적인 사찰의 입구에 다다르기 전에 승선교라는 다리가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호기심이 많은 아이처럼 개울 물가로 쪼르르 내려가 다리의 커다란 석재 아취를 프레임으로 하여 들여다보는 강선루의 모습은 고고하다. 한쪽 다리를 경사면에 깊게 내딛고 서 있는 모습에서 다른 건축물보다 신선하다.

 

 

본 건물에 다다르기 전에 우선 승선교 옆을 지나고 이 강선루 누각의 하부로 진입한다. 이 누각을 경계로 하여 성(聖)과 속(俗)의 공간개념은 뚜렷해지는 듯하다. 가을단풍의 계절도 좋지만 지금처럼 봄을 앞두고 초봄을 알리는 전령사인 홍매화가 터지고 있는 이른 봄에 방문한 선암사에는 은밀함과 특별한 아름다움이 숨어있다.

 

 

일주문을 통과하고 종각을 지나면 하나의 켜를 만나게 된다. 만세루가 얼굴을 보이며 이 중첩된 건축을 뒤로하면 조그마한 안 마당에 두 개의 탑이 아담하게 세월을 머금고 서있다. 두 탑은 의외로 거룩한 표정으로 서있어 사찰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방문자는 둘러싸인 중정에서 두 개의 탑을 바라보며 옷깃을 여민다. 이 곳이 만약 대학교라면 캠퍼스 코어(Campus Core)에 해당된다. 이름 그대로 선암사에서는 아주 핵심적인 장소다.

 

 

오밀조밀한 건축의 집합은 이 곳에서 끝나지 않고 다시 레벨을 위로하여 달마전과 산신각 그리고 각황전과 무우전의 비틀어진 축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경사지를 잘 활용하여 길과 계단을 만들어 낸 이 배치는 마치 시골마을을 연상하게 한다. 무리 지어 모여 있는 사찰의 건물들마다 나무들이며 이름 모를 꽃들과 화초들이 어우러져 있다. 연못도 여러 형식을 가지고 외부공간에 적절하게 배치되어있고 흰색의 수련 꽃이 탁한 물위에 해탈의 모습으로 부유해있다.

 

 

선암사는 많은 건축적, 조경적인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지만 자연스러운 배치로 잘 풀어낸 절이다. 배치뿐만 아니라 건축물들도 기교를 절제하고 투박해서 정겹다. 아무 곳이나 걸터앉아 시선을 뻗으면 새로운 경관이 만들어진다. 도시의 소음과 공해에 지쳐있는 방문객들이라면 신선한 공기와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 소리마저 시공을 초월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선암사는 일에 쫒기고 루틴한 삶에 지친 심신을 재충전하기에는 아주 좋은 답사지라고 할 수 있다.

 

건축가로 살아온 나에게 현실적인 건축적 해법과 서양 중심적 건축사고, 건축철학의 빈곤 등을 성찰하게 하고 자신 앞에 놓여진 산적한 문제들의 홍수 속에서 너무 현실과 쉽게 타협해버린 나의 자화상을 확인시켜준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 정호승 / 선암사

 

 

선암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낙안읍성 민속마을이 있다.

 

낙안읍성마을은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에 위치한 조선시대 도시계획의 고을로서 현재 읍성 내에 주민이 직접 살고 있는 대표적인 민속마을이다. 잘 보존된 초가들이 모여 있고 이웃 간에 정을 나누며 질박한 삶을 일구어 내는 전통적인 마을공동체이다. 주거 외에도 객사와 동헌, 서당까지 갖추고 있으며 각종 정원수들과 오래된 고목들이 어울려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다.

 

 

 

관광지에서 전시용으로 박제된 초가집은 흔하지만 실제 삶을 일구고 있는 초가집과 그 집들로 구성된 마을은 현실적으로 찾아보기 어려운데 100세대 가까운 가구가 모여 생활하고 있다니 반가운 마음이다. 동측입구인 낙풍루로 진입하여 성곽위로 올라 한바퀴 산책을 시작한다.

 

 

높은 위치에서의 산책은 잔잔한 봄바람과 함께 시선이 멀리 확장된다. 성곽의 가장 높은 곳에 다다라서 뒤돌아보면 크고 작은 초가들이 옹기종기 머리를 부비며 정답게 모여 있는 형상이 우리 전통건축의 특징인 군집의 미학을 떠올리게 한다.

 

 

마을의 배경에는 높은 금전산이 병풍처럼 감싸고 동화 속 마을처럼 고즈넉하고 평화롭다. 쌀쌀한 날씨지만 어디엔가 봄기운이 성곽마을을 소리 없이 점령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산책은 길 위에서 생각을 줍는 일이다. 성곽 위 산책이야말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기에 충분하다. 정호승 시인은 선암사를 가보고 시를 적었는데 애라 모르겠다, 나도 이 시간은 옛 사람으로 돌아가 낙안읍성을 주제로 시조라도 한 수 읊조리고 싶은 충동에 흉내를 내어본다.

 

대숲에 부는 바람에 짝을 잃었는지 산비둘기 울음소리가 구슬프다.

 

삼월의 바람은 아직 스산한데 홍매화는 용기 내어 얼굴을 내미는구나.

 

그 향기 잔잔하여 낙안읍성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하네.

 

적어 놓고 보니 그럴 듯하다. 나이가 드니 점점 '기승전 자뻑'에 망설임이 없어진다. 아마도 지금은 동백꽃들이 피어있겠지만 순천의 봄을 먼저 알려주는 홍매화의 향기가 지역의 핫플레이스, 선암사와 낙안읍성마을에 스미는 날을 고대한다.

 

 

[임진우 건축가의 스케치여행] - 글·그림 임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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