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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용어, 이젠 우리말로] 정형기 교수 "한국사 용어의 '한자투성이', 법(法) 조문 난해함에도 그대로 나타나"

가장 기본적인 법조문도 우리 말 쓰는
우리 국민이 뜻을 알 수 없는 '한자투성이'
"‘헌법(憲法)’이란 법 이름부터 일본식 한자말"
"지금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주권자인 시대"
"어렵게 쓸 필요 없는 법조문은 쉬운 우리말로 바꿔야"
"어렵게 쓴 법령을 쉬운 말로 고치는 법안 발의 활발"
"법은 쉬운 말과 글로 지어야"

 

[정형기 칼럼니스트/영산대학교 창조인재대학 자문교수] 대한민국에는 한글날이 있다.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과 함께 5대 국경일이다. 세상에 여러 문자가 있지만, 국민들이 하나로 쓰는 글 만든 날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나라가 몇이나 있을까.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서로 통하지 않아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이가 많다. 내 이를 위해 가엽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쓰기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한글은 우리 겨레 최고 유산이자 걸작이다. 스물넉 자 닿소리(자음)와 홀소리(모음)가 어울려 이름씨(명사), 움직씨(동사), 그림씨(형용사), 어찌씨(부사)를 만들어 내는 쉽고 과학적인 글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지 580년 흐른 지금 수많은 ‘아미’들이 BTS 노래를 따라 부르고 한글을 배운다. 우리말과 한글은 세계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K-문화’의 원동력이다.

 

아름답고 쓰기 편한 우리 말과 글이 유독 고생하는 데가 있다. 법(法)이다.

 

헌법, 민법, 형법, 상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기본법전에 우리 말 쓰는 우리 국민이 뜻을 알 수 없는 한자말, 일본말이 숱하다. 육법전서(六法典書)라는 용어 자체가 일본식이다.

 

일제 잔재가 가장 많은 분야가 법률이다. 한자를 한글로 바꾸고 일본식 표현을 고쳤어도 보통 사람들이 쓰지 않는, 알아듣지 못할 표현들이 남아 있다.

 

민법에 나오는 ‘제한능력자’, ‘통정한 허위의 의사표시’, ‘인지사용청구권’, ‘자연유수 승수의무’가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하는 국민이 몇이나 될까.


‘금치산자’, ‘한정치산자’라는 어려운 말을 ‘제한능력자’로 바꿔놓은들 그 뜻을 곧 알아차릴 국민은 법률 전문가들밖에 없을 것이다.


‘통정(通情)한 허위의 의사표시’는 ‘서로 알고 한 거짓 의사표시’란 뜻이다. 흔히 쓰는 ‘통정’과 뜻이 다르다. ‘이웃 땅 사용청구권’이라 하면 될 것을 ‘인지사용청구권’이라 하고, ‘흐르는 물 받을 의무’ 하면 될 것을 ‘자연유수 승수의무’라는 어려운 말을 쓴다. 堰을 ‘언’으로 바꿨다고 ‘둑’이라 바로 해독할 사람은 얼마 없다.

 

‘선의의 제3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는 말은 당사자 간에 이뤄진 무효이거나 취소할 수 있는 법률행위 결과는 그 무효 또는 취소될 법률행위에 기초해 새로운 이해관계를 갖게 된 제3자에게 무효 또는 취소를 주장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법 공부 좀 했다는 사람만 알아듣는다. 

 

형법도 마찬가지다.

 

법무부가 최근 1953년 형법 제정 이후 오래 남아 있는 일본식 표현을 우리말로 바꾸고 읽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한자 표현을 쉽게 알 수 있도록 개정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지만, 형법에 나오는 교사(敎唆)니 방조(幇助)니 부작위범(不作爲犯)이니 국헌문란(國憲紊亂)이니 하는 용어들이 다 70년간 굳어진 일본말이다.

 

하긴 ‘헌법(憲法)’이란 법 이름부터 일본식 한자말이다. ‘민주주의(民主主義)’니 ‘공화국(共和國)’도, 입법(立法) 사법(司法) 행정(行政)도 죄다 19세기 근대 서양 법제를 받아들이며 일본이 만든 조어(造語)다.

 

권력자들이 문자를 독점하고 문자해독 능력이 권력이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주권자인 시대다. 이미 일상용어가 된 법률용어는 두더라도, 굳이 어렵게 쓸 필요 없는 법조문은 쉬운 우리말로 바꿔야 한다.

 

국회에서는 어렵게 쓴 법령을 쉬운 말로 고치는 법률안 발의가 활발하다.

 

법제처도 2006년부터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 사업을 시작해 왔다. 최근 64개 형법 조문, 38개 형사소송법 조문 등 법무부와 함께 국민 일상생활을 규율하는 기본법들을 한글화하고 궁박(窮迫), 제각(除却) 등 일본식 표현도 순화할 거란다. ‘지능형 법령정보서비스 플랫폼’을 구축해 법률용어에 익숙지 않은 국민에게 편의를 제공할 계획이다.

 

‘국민과 함께하는 법령안 새로 쓰기’ 국민참여단이 현행 법령과 입법 예고된 각종 법령 속 어려운 용어나 문장에 개선 의견을 낼 수 있다 하니 ‘쉬운 법률 만들기 운동’에 국민들이 앞장설 일이다.

 

말은 ‘생각의 집’이요 글은 ‘말의 수레’라던가. 

 

문자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가 수천 년 시간, 수만 리 공간을 넘어 소통해 온 수단이다. 인류가 문명과 역사를 쌓아 올릴 수 있게 한 마법의 기호(記號)다. 

 

법(法)은 생각과 말과 행위가 다른 사람들이 공존하기 위한 합의 문서다. 국민 모두의 것이다.

 

같은 시대 사람도 알아듣지 못할 말과 글로 어찌 법을 만들고 후대에 물려줄 것인가.

 

법은 쉬운 말과 글로 지어야 한다.


# 정형기 칼럼니스트(영산대학교 창조인재대학 자문교수)는 경남고·서울법대를 졸업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7·18·20·21대 국회 보좌관으로 국정의 한 축을 맡아왔다. 아울러 국회 최초 온라인 미디어 <국회ON> 선임기자, 매체 <빅터뉴스> 편집장으로 언론에 종사했고 공교육살리기시민연합, 대한민국감사국민위원회 등 시민단체 활동 이력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