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이코노미=조경욱 기자] “위기는 생각보다 빨리 오고 기회는 생각보다 늦게 온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은 지난해 6월 말 서울 성수동 이마트 본사에서 진행된 하반기 경영전략회의를 통해 이같이 말했다. 그의 발언은 공교롭게도 곧 현실이 됐다. 이마트는 그해 2분기 창사 이래 첫 적자를 기록하며 시장에 충격을 가져왔다. 대만민국 1등 유통 리테일을 자부하던 이마트의 주가는 역대 최저로 곤두박질쳤고 온라인 사업에서도 선발주자와 간극을 좁히지 못했다.
3분기 실적이 반등하며 영업이익이 흑자 전환에 성공하는 듯 보였지만 마트 부문을 비롯한 전문점(삐에로쑈핑·노브랜드·부츠 등)의 부진이 지속되며 4분기 두 번째 적자를 기록했다. 특히 2018년 말 신세계·이마트에서 분할 신설된 SSG닷컴은 경쟁 업체들과 출혈경쟁으로 인해 손해가 누적되는 상황이다. 이커머스 사업을 강조하고 마트 외 부문 성장을 주력해온 정 부회장의 행보와 상반되는 결과다.
◆ 따라하기 급급한 정용진식 혁신
정 부회장이 주도적으로 추진한 사업들은 ‘모방’과 ‘혁신’의 기로에 서있다는 평이 주를 이룬다. 그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자신의 일상과 관심사를 대중에 공유하며 트렌디하고 감각 있는 젊은 기업인 이미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처럼 ‘유행’에 민감한 정 부회장의 모습은 향후 추진하는 사업에서 ‘벤치마킹’이란 이름으로 적용됐다.
일례로 유통업계의 가성비 바람을 불러온 이마트의 PB ‘노브랜드’는 캐나다 유통업체 로블로의 PB ‘노네임’을 적극 벤치마킹했다. 1978년 출시된 로블로의 노네임은 ‘절약은 간단하다’는 표어를 내세우며 ‘노란색 바탕에 검은 글씨’를 사용해 제품 포장을 단순화했다. 공급업체에 대량주문을 통해 원가를 절약했고 제품 자체의 광고가 아닌 ‘노네임’이란 브랜드를 홍보했다. 이러한 전략으로 시중 브랜드 제품보다 10~40% 저렴한 제품을 소비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었다.
이마트의 노브랜드는 ‘브랜드가 아니다. 소비자다’라는 표어를 내걸고 지난 2015년 출시됐다. 소비자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공감하겠다는 의미다. 제품 포장 역시 노네임과 동일한 ‘노란색 바탕에 검은 글씨’를 사용했고, 불필요한 비용을 최소화해 ‘가성비’ 전략을 펼쳤다. 전략은 적중했고 노브랜드는 소비자에게 하나의 트렌드이자 가성비 좋은 상품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정 부회장식 ‘따라하기’가 꼭 성공으로는 귀결되지는 않았다. 정 부회장이 1년을 공들여 준비했다는 ‘삐에로쑈핑’은 알록달록 화려한 간판과 소비자의 탐험을 유도하는 복잡한 진열 등으로 일본의 돈키호테를 적극 벤치마킹했지만 론칭 1년여 만인 지난해 7월 논현점과 의왕점이 폐점에 들어갔다.
이어 핵심 상권으로 꼽히는 명동점까지 영업종료를 알렸고 지난해 12월에는 남은 매장을 2020년 안에 순차적으로 종료하겠다고 밝히며 사실상 백기를 흔들었다. 1989년 창사 이래 매년 매출과 영업이익이 우상향을 그려온 돈키호테와 상반되는 결과다.
신세계프라퍼티의 복합쇼핑몰 '스타필드' 역시 호주계 대형 유통 체인 '웨스트필드'를 벤치마킹했다. 로고의 모양새와 건물 내외부의 모습 그리고 유리 천장까지 매우 닮은 모습이다.
정 부회장이 아이디어를 냈다는 신세계푸드의 수제맥주 펍 '데블스도어'의 로고도 미국의 유명 수제맥주 브랜드 '스톤'과 흡사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스톤의 수제맥주는 국내 마트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수입·유통하는 곳이 바로 신세계 L&B다.
데블스도어의 로고에 등장하는 괴물 ‘가고일’은 인간과 새를 합쳐 놓은 외관에 날카로운 뿔과 날개가 달린 모습이다. 하지만 데블스도어가 해당 로고를 만들기 앞서 이미 같은 소재의 로고가 미국 수제맥주 스톤에서 사용돼 왔다. 아울러 데블스도어에서 판매 중인 햄버거와 감자튀김 역시 뉴욕에 위치한 유명 펍 ‘The Spotted Pig’의 메뉴와 유사하다는 평이다.
이에 대해 한 재계 관계자는 “과거 정 부회장이 미국 아이비리그에서 유학 생활을 하며 보고 느낀 것이 많았을 것”이라면서 “정 부회장 주도로 해외 기업들의 운영 사례를 이마트 및 계열사에 많이 적용해 온 것은 사실”이라고 전했다.
조경욱 웹이코노미 기자 webeconom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