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이코노미=글·그림 임진우] 서울 강북에는 600년 역사도시에 걸맞게 유적과 옛 가옥들이 곳곳에 보석처럼 숨어있다. 그 중 과거의 서울인 한양을 둘러싼 성벽과 그 구간에 자리 잡은 성문들을 모두 일컬어 '한양도성'이라고 칭한다.
이 곳은 '스케치 여행'이라기보다 '스케치 답사'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지만 과거로의 시간여행이라는 의미를 가져본다.
한양도성은 한국도성의 전통을 잇는 중요한 단서로서 시대에 따라 축조기법과 형식이 차이를 보여준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훼손되는 불운을 겪었지만 서울시의 지속적인 복원노력으로 지금은 서울시민의 자랑거리이자 관광객들에게 사랑받는 장소가 되어가고 있다.
회사 위치가 이화동 사거리여서 날씨가 좋은 날에는 출근길로 낙산구간을 넘어 이화마을로 걸어서 가끔 이용하는 편이다.
한양도성에는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과거 600년 조선왕조에서 현대 도시에 이르기까지 유구한 세월을 견뎌내며 시간을 끌어안은 채 서울의 중요한 랜드마크로 존재한다. 서울의 내사산인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의 능선을 따라 약 18.2km로 축성된 이 성곽은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사시사철 다양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때로는 용트림의 메타포로 인왕산과 바위를 따라 힘차게 오르기도 하고 평지를 만나면 성벽을 따라 걷는 시민들의 발걸음을 친근하게 이끌어주기도 한다. 그리고 흥인지문, 숭례문에서는 자신이 주인공이 되었다가 나무들이 둘러싼 장소에서는 겸손하게 배경으로 물러나 앉기도 하며 계절마다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존재감을 보여준다. 꽃이 만발하는 봄에도, 신록이 우거지는 초록의 여름과 낙엽이 지는 퇴색의 가을에도 한양도성은 아름답다.
특히 지난 겨울 동안에는 눈이 내리는 한양도성 낙산구간의 길을 걸어보고 싶어서 함박눈이 펑펑 내릴 때를 기대하고 기다렸다. 설경 속에 하얗게 변한 한양도성과 마을의 풍경을 나의 눈으로 확인하고 사진과 그림으로 꼭 기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걸어보는 길이지만 눈이 내리면 저 성벽은 어떤 풍경을 보여줄까를 상상해보니 소풍을 앞 둔 어린 아이의 심정으로 설렌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는지 이윽고 새벽부터 내린 눈이 그치지 않고 내리고 있다. 예년에 비해 눈이 드물게 내려서인지 설레는 마음이 더욱 고조되는 아침이다. 성벽 길로 향하는 발걸음은 보고 싶던 연인을 만나러 가는 듯 분주하다. 앞서 종종 걸음으로 행여 미끄러질세라 뒤뚱거리며 걷는 행인의 뒷모습을 보며 발자국을 따라 조심조심 걸어본다. 이미 보도와 계단위에는 어지러운 발자국들이 시간의 켜를 두고 어지럽게 중첩되어있다. 찍히는 순간 이미 과거의 흔적이 되고 마는 발자국이라는 녀석은 언제나 과거시제의 운명을 타고난 걸까.
오랜 시간을 견뎌온 한양도성의 거친 석재의 벽면에도 세월처럼 눈이 쌓이고 앙상한 겨울나무 가지위에도 조금씩 흰눈이 덮인 채 새로운 풍경은 선물한다. 낙산구간 인근의 작은 주택들이 함박눈에 함몰되어감에 따라 한양도성은 한층 더 신비하게 보인다. 잠시지만 과거로 이동하여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다. 경사를 오르다 뒤돌아서서 내려다 본 장수마을 너머의 설경은 압권이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하얀 조각의 지붕들과 병풍처럼 서있는 아파트가 어우러져 순백의 감성을 자극한다.
이처럼 과거와 현재, 도시와 자연이 공존하는 한양도성을 따라 걷고 사시사철의 풍경을 기록하는 일도 나의 행복한 일상 중에 하나다. 자세히 관찰할수록 오랜 시간동안 묵묵히 자리를 지켜낸 성벽의 돌멩이 하나하나가 모두 대견스럽다. 겨우내 숨죽였던 나무들이 성벽 너머에서 다시 기지개를 켜는가 싶더니 어느새 녹음이 짙다. 성벽이 지켜온 시간은 정지되어 보이지만 세월은 빠르다.
<임진우 건축가의 스케치여행> - 글·그림 임진우 정림건축 대표
webeconomy@naver.com